《우리의 작은 무대》
7부. 준호의 가정사
스페이스러브가 결성된 이후, 준호는 언제나 분위기 메이커였다.
연습이 잘 안 풀리면 과장된 표정으로 드럼 스틱을 마이크처럼 잡고 쇼를 했고,
하은이 음을 놓치면 “우리 보컬님 오늘 바이브 너무 예술인데?” 하고 장난쳤다.
민준이 박자를 어긋내면 “아 역시 천재들은 인간의 박자와는 안 맞는다니까!” 하고 웃었다.
그 덕분에 어색할 틈도, 심각할 틈도 없이 연습은 늘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가끔 연습을 끝내고 다 같이 분식집에 가자고 하면, 준호는 “야 나 알바 가야 돼”라며 황급히 가버렸다.
그 뒷모습이 괜히 허전해 보여, 민준은 마음 한구석이 자꾸 걸렸다.
어느 토요일 오후, 연습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었다.
하은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들 오늘 고생했어. 내일도 오전에 보자!”
유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민준도 기타를 매고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준호는 연습실 문을 잠그고 있었다.
“야 너도 같이 가자. 우리 떡볶이나 먹고 헤어지자.”
“아… 나 오늘도 알바야.”
“맨날 알바냐? 너 대체 뭐 하는데.”
하은이 장난스럽게 팔짱을 꼈다.
준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냥… 카페에서 설거지 좀 하고. 주말엔 주유소도 가고.”
“너 돈 엄청 모으겠다?”
“하하… 뭐 그래야지.”
그 말에 민준은 괜히 가슴이 서늘했다.
뭔가 농담 같은데, 농담이 아닌 표정이었다.
그날 밤, 민준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야, 너 내일 연습 전에 잠깐 볼래?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왜? 너 또 내 리듬 못 맞춘다고 뭐라 할 거냐?ㅋㅋ
아님. 그냥 할 말 있어서.
오키. 연습실 앞에서 보자.
다음 날, 민준은 연습실 앞 벤치에 앉아 준호를 기다렸다.
가을 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조금 있으니 준호가 나타났다.
평소처럼 밝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민준은 살짝 안심했다.
“왜 이리 심각하게 부르셨어요? 나 혹시 퇴출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민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알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돼?”
준호는 순간 웃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벤치에 털썩 앉았다.
“하… 그 얘기 할 줄 알았다.”
민준은 괜히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그러자 준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모르지. 우리 집 사정.”
“…말 안 해줬잖아.”
“그러니까.”
준호는 드럼 스틱을 가방에서 꺼내 빙빙 돌렸다.
그러다 멈춰서 말했다.
“우리 엄마 혼자야. 아빠는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가 식당에서 일하면서 겨우 우리 둘 먹여 살리는데…
요즘 허리도 많이 안 좋아서.”
민준은 말없이 준호를 바라봤다.
평소처럼 껄렁하게 웃기만 하는 얼굴이 오늘은 이상하게 작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돈 좀 보태야 돼.
등록금이랑… 병원비도 들어가고.
그래도 엄마한테 내색 안 하려고 일부러 더 웃는 거다.”
민준은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괜히 ‘떡볶이나 먹자’며 가볍게 얘기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근데… 왜 계속 밴드 해?”
그 질문에 준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민준을 바라봤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야, 그걸 왜 물어.”
“궁금해서.”
준호는 한참을 고민하듯 허공을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연습할 때가 제일 좋으니까.”
민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랑 있을 때?”
“응.
드럼 치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
집 걱정도, 돈 걱정도, 엄마 아픈 것도.
그때만큼은 진짜 내가 나 같아서.”
민준은 그 말을 듣자 괜히 눈이 시큰해졌다.
“야… 너 진짜 못났다.”
“뭐래, 갑자기.”
“그렇게 다 꾹 참고 있었으면, 좀 티라도 내지.
맨날 너 때문에 웃고 넘겼는데, 속으론 얼마나 힘들었겠냐.”
준호는 장난스럽게 민준의 머리를 툭 쳤다.
“티 내면 너 울 거잖아.
근데 솔직히 말해서… 나 이 밴드 없었으면 진짜 못 버텼을 거다.”
그날 연습실에 들어가자 하은과 유리가 이미 와 있었다.
민준과 준호가 들어서자 하은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완전 신곡 작업할 거야.
밤새도록 하자.”
유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드럼 스틱을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오케이! 오늘은 진짜 프로처럼 간다.”
민준은 그런 준호를 바라보다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은 이제 조금 더 깊은 의미였다.
서로가 왜 음악을 붙잡고 있는지 알게 된 뒤라서, 그 웃음에는 묘한 결속감이 깃들었다.
연습이 시작됐다.
하은의 목소리가 피아노 위를 타고 흘렀다.
유리의 베이스가 묵직하게 깔리며, 준호의 드럼은 이제 더 이상 가볍지 않았다.
박자 하나하나가 마치 땅을 찍듯 단단했다.
민준은 그 위에 기타를 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진짜 이제 하나 같네.’
곡이 끝나자 모두 동시에 숨을 고르며 웃었다.
하은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야… 방금 거 완전 소름 돋았다.”
유리도 수줍게 웃었다.
“우리 이제 진짜 잘 맞아가는 것 같아.”
준호가 민준을 보며 말했다.
“야, 너 오늘 완전 쩔었다. 리프 미쳤어.”
민준은 장난스럽게 기타를 들어 보였다.
“당연하지. 오늘부터 내가 기타 천재 인증임.”
연습을 마치고 네 사람은 음악실에 그대로 앉았다.
준호가 드럼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너희는 진짜 모르지.
내가 이 드럼 치는 동안만큼은, 아무 걱정 없는 거.”
하은이 피아노를 살짝 두드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알아.
나도 노래할 때만 괜찮거든.”
유리는 조용히 베이스를 바라보다 말했다.
“나도.”
민준은 기타 줄을 살짝 튕기며 작게 웃었다.
“우리 다 똑같네.”
밤늦게 연습실 문을 나서며 준호가 민준에게 작게 말했다.
“야, 오늘 고맙다.”
“뭐가.”
“그냥… 너 아니었으면 나 그 얘기 죽어도 안 했을 거다.”
민준은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준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드럼 쳐라.
우리 없으면 너 어디 가서 또 그렇게 웃겠냐.”
준호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민준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밤, 두 사람은 별 말 없이 집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엔 이상하게 따뜻한 것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