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작은 무대》
11부. 다시 한마음
서울에서 돌아온 하은은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잠시 멈춰 섰다.
낡은 나무 바닥, 오래된 피아노, 구석에 놓인 유리의 앰프와 준호의 드럼…
그리고 그 위에 흐르듯 놓인 햇살.
모두 익숙했고, 그래서 더 애틋했다.
민준은 기타를 조율하다가 하은을 보고 살짝 멈췄다.
하은의 표정이 예전과 조금 달랐다.
무언가 결심이 담긴 얼굴이었다.
“왔어?”
민준이 조용히 물었다.
하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말했다.
“나… 서울 그 기획사 안 가기로 했어.”
순간 음악실이 조용해졌다.
유리도 놀란 눈으로 하은을 바라봤다.
준호는 스틱을 잡은 채 잠시 얼어 있었다.
“왜?”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은은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거기 가면… 분명 좋은 가수가 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민준은 숨을 고르며 하은을 바라봤다.
하은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지만, 그만큼 단단했다.
“나는… 그냥 너희랑 같이 노래하고 싶어.
네 기타 소리 듣고, 유리 베이스 소리 듣고, 준호 드럼에 맞춰서…
같이 웃고 싶어.”
유리는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하은에게 다가가 꼭 안았다.
“잘했어… 진짜 잘했어.”
준호도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였다.
“야, 너 서울 가서 우리 잊어버리면 나 너 집까지 찾아가서 끌고 올 뻔했다.”
하은이 유리에게서 몸을 떼며 웃었다.
“근데… 미안해.
너희 다 나 때문에 혹시나 불안했을 거 아냐.”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솔직히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냥 고맙다.”
하은과 민준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게 오갔다.
그날 연습은 유난히 뜨거웠다.
하은은 예전보다 더 크게 노래했고,
민준의 손가락은 기타 줄 위를 미끄러지듯 자유로웠다.
유리도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당당히 베이스를 울렸다.
준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드럼을 치다 “이게 바로 진짜 밴드 아니겠냐!” 하고 소리쳤다.
곡이 끝나자 네 사람은 동시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유 없이 모두 동시에 웃었다.
“야… 우리 진짜 멋있어졌다.”
하은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제 우리 노래 같아.”
연습이 끝나고 민준과 하은은 음악실에 조금 더 남았다.
창밖엔 벌써 어두운 밤이 내려앉았고,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희미한 빛의 줄을 만들고 있었다.
하은은 피아노 건반을 가만히 눌렀다.
조용히 퍼지는 음이 마치 두 사람의 숨소리 같았다.
“있지.”
하은이 천천히 말했다.
“나 서울 올라갔을 때, 솔직히 진짜 흔들렸어.
막 fancy한 스튜디오 보여주고, 유명한 프로듀서들도 있고…
내가 거기서 노래하면 뭔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 같았어.”
민준은 그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근데… 녹음실 부스 안에 혼자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외롭던지.”
하은은 작게 웃었다.
“여기서는 너네랑 같이 연주하면 하나도 안 무서웠거든.
근데 거긴… 그냥 나 혼자였어.
그래서 확실히 알았어.
난 너희랑 같이 노래해야 행복하다는 거.”
민준은 기타를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은의 손을 잡았다.
“잘 돌아왔어.
너 없으면 우리 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기타 천재님.”
“야, 그 별명 좀 그만 부르라니까.”
하은은 피아노에 몸을 기댄 채 장난스럽게 말했다.
“안 그럼 어떡할 건데?”
“안 그럼…”
민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갑자기 하은의 얼굴을 살짝 당겨 이마를 맞댔다.
“이렇게 한다.”
하은은 순간 깜짝 놀랐지만, 곧 장난스럽게 민준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놀라고 한 거거든.”
하은은 잠시 민준의 눈을 바라보다, 작게 속삭였다.
“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할 거야.
우리 밴드… 진짜 멋진 무대 서게.”
민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이 가자.”
그날 밤, 네 사람은 분식집에 모였다.
소소한 축하 파티였다.
테이블 위에는 떡볶이, 튀김, 순대가 가득했고, 준호가 사온 캔콜라도 놓여 있었다.
“야, 근데 너네 진짜 알지?
우리 이렇게 모인 거, 진짜 대단한 거다.”
준호가 튀김을 들며 말했다.
“나 옛날에 우리 학교에서 이런 거 하는 애들 보면 좀 이상해 보였거든.
왜 저렇게까지 할까 싶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 이상한 놈 됐네.”
하은이 웃었다.
“그러게.
근데 나도 그 이상한 거 할래.”
유리는 작게 말했다.
“우리 계속 이상해지자.”
민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래.
죽을 때까지 이상해지자.”
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반짝였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던, 시골 밤하늘만의 별이었다.
하은이 옆에서 말했다.
“우리 앞으로도 계속 이 별 아래서 노래 부르자.”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디 가든, 결국 여기로 돌아오자.”
하은이 장난스럽게 팔짱을 꼈다.
“약속.”
“응.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