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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무대

우리의 작은 무대 - 2부. 밴드부의 시작

by 창작소설 글쓴이 2025. 7. 6.

《우리의 작은 무대》

2부. 밴드부의 시작

민준은 그날 밤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운 채, 낮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낯선 교실, 낯선 친구들, 그리고 유난히 눈에 맴도는 윤하은의 웃음.
무엇보다 음악실에서 혼자 기타를 치다 그녀와 마주쳤을 때 느낀 묘한 떨림이 자꾸 가슴을 간질였다.

‘내일 또 보자고 했지…’

민준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두운 방안에서 그의 심장은 괜히 더 크게 뛰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자 민준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책가방을 정리했다.
책상 옆에 세워둔 기타 케이스를 집어 들고 복도를 나섰다.
운동장에는 축구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체육관 쪽에선 배드민턴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을 지나 학교 뒤편 음악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안에는 이미 하은이 와 있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뭔가 열심히 노트를 보고 있었다.
그 앞엔 긴 머리를 낮게 묶은 여자아이가 조용히 앉아 있었고, 옆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밝은 표정의 남자아이가 드럼 스틱을 휙휙 돌리고 있었다.

하은이 민준을 보자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왔다!”

민준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하은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쪽은 우리 밴드부 멤버들이야. 드럼 치는 김준호, 베이스 치는 박유리.”

준호가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짧은 머리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그는 보기만 해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오~ 네가 민준이구나? 하은이가 완전 난리였어. 드디어 기타리스트 구했다고.”

“야, 난리라니. 무슨.”

하은이 민망한 듯 준호의 팔을 툭 쳤다.
준호는 껄껄 웃으며 민준의 손을 크게 잡았다.

“암튼 잘 부탁한다. 나 드럼밖에 모르니까 기타는 네가 다 책임져.”

그 옆에서 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크게 웃지도,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에는 어딘가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안녕… 잘 부탁해.”

민준도 조용히 웃으며 인사했다.


하은이 피아노 앞에 앉아 노트를 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밴드 이름도 정하고, 첫 합주도 해보자!”

“갑자기 밴드 이름부터?”

민준이 당황하듯 물었다.
하은은 장난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이런 건 처음이 중요하거든. 팀 이름이 있어야 뭔가 더 진짜 같잖아.”

준호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오케이! 내가 어제 생각해봤는데 ‘천하무적 밴드’ 어때? 간지 나지 않냐?”

하은이 표정을 구기며 피아노 뚜껑을 탕 하고 닫았다.

“그건 무슨… 트로트 팀 같잖아.”

“야, 트로트라니! 그럼 ‘파이어 드래곤’은?”

유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RPG 게임 보스 이름 같아…”

“헐.”

준호가 손을 내리고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민준이 기타를 조율하며 무심히 내뱉었다.

“스페이스러브 어때?”

모두가 동시에 민준을 바라봤다.
하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스페이스러브? 왜?”

“그냥… 어디까지 갈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같이 가보자는 느낌.
우주처럼 넓게, 그리고… 뭔가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그 말에 하은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난 좋은데? 낭만 있어.”

준호가 어이없다는 듯 민준을 쳐다보다가 결국 허탈하게 웃었다.

“야… 네가 유치하다고 해놓고 결국 낭만 어필하네? 하… 됐다. 니네가 좋다는데 뭐.
좋아, 오늘부터 우리는 ‘스페이스러브’다.”

유리도 작게 웃었다.
그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동의의 의미였다.

하은은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단체 채팅방을 만들었다.
채팅방 이름에는 큼지막하게 <스페이스러브>가 떠 있었다.
그걸 보고 민준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은이 노트를 넘기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진짜 연습해보자. 이 곡은 내가 예전에 만든 건데, 아직 완성은 아니거든.
코드 진행이랑 멜로디만 있어서 같이 맞춰보면서 완성하자.”

하은은 피아노로 가볍게 코드를 짚었다.
E minor, C, G, D.
민준은 익숙한 코드 진행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타를 들었다.
유리는 조심스레 베이스를 꺼냈다.
준호는 드럼을 정리하며 신이 난 표정으로 스틱을 돌렸다.

“간다!”

하은의 피아노가 먼저 시작됐다.
그 뒤를 유리가 살짝 긴장한 손끝으로 따라갔다.
민준도 조심스레 스트로크를 넣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호의 드럼이 박자를 빠르게 끌어버렸다.

“야야야! 준호, 너무 빨라!”

하은이 놀라 외쳤지만 준호는 이미 한참 신이 나 있었다.
결국 리듬이 흐트러지며 유리가 멈췄고, 민준도 실수로 코드가 꼬였다.
엉망진창이 된 음악은 결국 하은의 한숨과 함께 멈췄다.

준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하게 웃었다.

“아… 내가 좀 흥분했나?”

“좀? 완전 광란의 속도였거든?”

하은이 피아노를 툭 치며 투덜댔다.
그러나 민준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원래 처음은 다 이런 거 아니야?”

유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맞아… 우리 처음엔 더 심했어.”

준호가 유리를 보며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너 덜 떨더라? 나 때리면서 박자 잡던 때보단 낫지.”

유리는 얼굴이 붉어지며 민준을 흘낏 바라봤다.

“그건… 너가 너무 빨라서… 그래도… 다시 해보자.”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타 줄을 다시 튕겼다.
이번엔 더 집중했다.
하은이 다시 피아노로 신호를 주자, 유리가 한 박자 늦게 들어왔다.
민준은 그 속도에 맞추어 부드럽게 스트로크를 넣었다.
준호도 이번엔 표정이 진지했다.
스틱을 가볍게 두드리며 템포를 잡더니 점점 힘을 실었다.

서툴렀지만, 이번엔 분명히 하나로 엮이는 소리가 있었다.
하은의 목소리가 피아노 위를 타고 살포시 흐르자, 민준은 그 목소리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타에서 울리는 음 하나하나가 피아노와 드럼, 베이스와 얽혀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곡이 끝났을 때, 네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땀이 살짝 맺힌 하은이 얼굴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며 웃었다.

“봐. 할 수 있다니까.”

준호가 스틱을 어깨에 걸치며 크게 웃었다.

“우리 이거 한두 달만 더 하면 진짜 간지 날 듯!”

유리는 조심스럽지만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조금만 더 맞춰보자.”

민준은 그 말을 듣고 괜히 마음이 찡했다.
서울에서 친구들과 잠깐 밴드를 했을 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음악보다도 경쟁과 평가가 먼저였다.
여기서는 달랐다.
이 작은 음악실에서, 서로 실수하면서 웃고, 다시 맞춰가는 그 모든 과정이 음악 같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창가로 들어온 붉은 햇살이 음악실 벽에 길게 드리워졌다.
준호는 드럼을 닦으며 말했다.

“야, 나 내일도 올 거야. 오늘 재밌었다.”

“나도… 내일도 연습하자.”

유리의 목소리엔 작지만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은은 피아노 위에 노트를 놓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아, 너 진짜 와줘서 고마워.”

민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뭘. 나도 재밌었어.”

하은이 살짝 웃었다.
그 미소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안했다.


음악실을 나오며 민준은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저녁 바람이 시원했다.
멀리서 보이는 마을의 작은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스페이스러브라…’

민준은 작게 중얼이며 웃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이 밴드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