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찾기 위해, 다시》
7부. 텅 빈 성공
고급 호텔 스위트룸.
서준은 거실의 넓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눈앞에는 대리석 테이블, 그 위에 반쯤 비워진 와인잔이 놓여 있었다.
손에 들린 와인잔을 가만히 흔들자
붉은 액체가 잔 안에서 부드럽게 일렁였다.
“지유…”
조용히 이름을 불러봤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낯선 방 안에서 메아리조차 없이 사라졌다.
스마트폰 화면은 여전히 바쁘게 깜빡였다.
[내일 오전 M&A 최종 보고 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스위스 본사 회장님이 다음 주 일정 확인 부탁하셨습니다.]
[조선일보 단독 인터뷰 건 확인 바랍니다.]
끝도 없이 올라오는 문자와 메일.
모두 중요한 일들이었을 것이다.
이 세계의 서준이라면 분명 의욕적으로 처리했겠지.
그러나 지금 이 서준은
그 모든 게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방 안은 점점 더 커다란 구멍처럼 느껴졌다.
너무 넓어서 더 외로웠다.
벽에 걸린 고급 그림, 정갈하게 진열된 고급 주류들,
아무도 없는 긴 복도.
‘여기엔 내가 웃을 이유가 없어.’
서준은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깜빡이며 도시를 수놓고 있었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도
웃고 울고, 사랑하고 싸우는 사람이 살겠지.’
그런데 자신에게는 그게 없었다.
웃어줄 사람도, 기다릴 사람도.
문득
지유와 함께 걸었던 축제 거리의 불꽃놀이가 스쳤다.
빛나는 불꽃, 그걸 올려다보며 수줍게 웃던 지유의 얼굴.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가슴이 갑자기 찌릿하게 아려왔다.
“지유…”
혼자 이름을 불러봤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혹시 어디선가
그 이름에 대답이라도 해 줄까 봐.
그러나 방 안에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가볍게 웅웅 울릴 뿐이었다.
서준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마치 먼지를 닦듯, 조용히.
그 밤
침대에 누워도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또다시 그 꿈이 찾아왔다.
캠퍼스의 잔디밭.
서준은 지유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계속 이렇게 있자.”
지유가 작게 웃었다.
“응.
계속 이렇게 있자.”
그때였다.
그녀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투명하게 번지듯, 불꽃놀이처럼 흩어졌다.
“안 돼…
안 돼, 가지 마…!!”
서준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손을 뻗었지만,
그 손끝에 닿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번쩍 떴을 때,
숨이 거칠게 몰아쉬어졌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시트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서준은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왜 또 이런 꿈을 꾸게 하는 거야…”
그리고 그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당신이 원했던 삶입니다.”
서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또렷했다.
“성공, 돈, 명예.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원했지요.”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어.
나는… 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을 더 원했습니까?”
그 질문에 서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지유…
나는…
지유만 있으면 됐어.”
그러자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해졌다.
창가의 커튼이 없는 바람에 스르륵 흔들렸다.
그리고 그 틈으로
검은 공간이 벌어지듯 열렸다.
그 안에서
관리자가 나왔다.
여전히 깔끔한 양복 차림.
조용히 서준을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지금,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모든 것?
아니요.
이 세계에는 지유가 없잖아요.”
관리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당신이 원한 대로 이루어진 겁니다.
당신이 원한 성공, 원하는 부, 원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삶.”
“그게…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나는… 지유가 없는 이 삶,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에요!”
서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다가
결국 터져 나왔다.
“왜…
왜 나한테 이런 세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관리자는 한참을 서준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했으니까요.”
“뭐라고요…?”
“당신은 간절히 바랐지요.
다시는 무기력하게 살지 않겠다고.
가진 게 없어서 지유를 지키지 못했다고 후회했으니까.”
서준은 숨이 멎는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관리자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무엇이든 얻으면 반드시 무언가를 잃게 됩니다.”
“…그럼 이번에는
지유를 잃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서준은 몸이 휘청였다.
숨이 턱 막혔다.
‘결국 또…
다시 지유를 놓쳤어…’
그러자 관리자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서준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 손을 잡았다.
‘지유…
이번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를 지킬 거야.’
그러자 방 안이 삽시간에 뒤틀렸다.
모든 풍경이 빛과 그림자로 갈라지며 휘몰아쳤다.
그리고 다시,
서준의 몸은 어디론가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