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작은 무대》
8부. 첫 자작곡 완성
가을이 점점 깊어지며 공기는 차가워졌지만,
민준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특유의 낡은 나무 냄새와 악기들의 냄새가 숨통을 확 트이게 했다.
피아노 위에 놓인 하은의 노트, 구석에 세워진 준호의 드럼 스틱 가방,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리에 놓인 유리의 베이스 케이스.
그 작은 것들이 이제 민준에겐 너무도 소중했다.
그날은 조금 특별했다.
하은이 전부터 살짝씩 흥얼거리던 멜로디를 이제 진짜 노래로 만들어보자는 날이었다.
“오늘은… 우리 노래 만들자.”
하은이 피아노 앞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묘하게 떨렸다.
민준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곡? 아직 우리끼리도 제대로 박자 못 맞출 때도 있는데?”
“그러니까 더 필요하지.
우리 이야기로 만든 노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은이 그렇게 말하자 준호가 드럼 스틱을 돌리며 씨익 웃었다.
“난 좋아.
이제 남 노래만 하는 것도 슬슬 질렸거든.”
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 노래 해보고 싶어.”
하은은 조심스럽게 피아노를 눌렀다.
낮고 잔잔한 코드를 몇 번 치다가, 그 위에 작게 멜로디를 얹었다.
처음엔 불안정했지만, 몇 번 되풀이하자 멜로디가 점점 자리를 잡았다.
유리가 조용히 베이스를 꺼내 무릎에 올렸다.
“이거… 따라가볼게.”
툭, 하고 베이스가 낮게 울렸다.
준호도 스틱을 들어 드럼 위를 살살 건드리며 리듬을 만들어갔다.
민준은 기타를 조율하다가 가볍게 스트로크를 넣었다.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 사이로 그의 기타 소리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연주가 서서히 한 덩어리가 되었다.
곡이 끝나자 네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봤다.
“이거… 괜찮은데?”
하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준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거 같아.”
그날 이후 음악실은 완전히 작업실이 되었다.
하은은 작사 노트를 꺼내 끄적였고, 민준은 밤새 기타 라인을 만들어왔다.
준호는 리듬을 다양하게 변주하며 더 좋은 흐름을 찾으려 했다.
유리는 조용히 박자를 잡아주며, 때로는 모두가 혼란스러울 때 중심을 지켜줬다.
“가사에 우리 이야기 넣자.”
하은이 말했다.
“무슨 이야기?”
준호가 묻자 하은은 웃었다.
“그냥… 우리가 왜 이거 하고 있는지.
왜 드럼 치고, 왜 베이스 잡고, 왜 노래하는지.”
민준은 기타 줄을 살짝 눌렀다.
“우리 처음 만난 거, 축제 때 망한 거, 다시 합주했던 거… 그런 거 다 넣자.”
유리는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같이 있으니까 괜찮다고도.”
하은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건 그냥 노래가 아니라 우리 얘기니까.”
며칠 동안 학교 수업이 끝나면 네 사람은 곧장 음악실로 향했다.
늦게까지 조명을 켜두고 합주를 하다 보면, 창밖은 어느새 칠흑같이 어두웠다.
민준의 손가락은 계속 기타를 잡아서 굳은살이 더 두꺼워졌다.
하은의 목소리는 자꾸 쉬었고, 준호의 손등에는 스틱 자국이 붉게 패였다.
유리도 손톱이 줄에 계속 부딪혀 깨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무도 힘들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보고 더 웃었다.
“야, 너 손 봐라. 완전 전사네.”
준호가 유리의 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유리는 웃으며 준호의 손을 살폈다.
민준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타 줄을 튕겼다.
그 소리가 너무 좋아서, 마치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드디어 그 노래가 완성됐다.
밤늦은 음악실, 창문 밖에는 별이 쏟아질 듯 떠 있었다.
하은은 마지막으로 가사를 노트에 꾹꾹 눌러 썼다.
그리고 모두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노래 제목 뭐로 할까?”
민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리 이야기니까… 그냥 ‘우리의 작은 무대’ 어때?”
하은이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좋다.
우리 진짜 작은 무대에서 시작했잖아.”
준호도 스틱을 높이 들어올렸다.
“난 찬성.
그리고 우리 앞으로 더 큰 무대 서면, 그때도 이 제목으로 하자.”
유리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완전한 합주가 시작됐다.
피아노가 낮게 깔리고, 유리의 베이스가 그 위에 얹혔다.
준호의 드럼이 천천히 리듬을 잡았다.
그리고 민준의 기타가 부드럽게 흐르자, 하은이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조금은 서툴러도 괜찮아
너와 내가
같은 노랠 부르고 있으니까…”
하은의 목소리가 흔들리다가 곧 단단해졌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기타 줄이 떨릴 때마다 심장도 같이 떨렸다.
옆에서 들려오는 드럼, 베이스, 피아노 소리가 하나로 이어졌다.
곡이 끝나자 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하나둘씩 웃음이 터졌다.
“우리 진짜 노래 만들었어.”
하은이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야, 울 거냐?”
준호가 웃으며 장난쳤다.
“울어도 돼. 이건 울 만한 거야.”
민준이 기타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너희 다.”
하은이 피아노에서 일어나 유리를 꼭 안았다.
준호도 유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민준은 기타를 든 채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무슨 문제가 있든 아무래도 좋았다.
오직 네 사람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만 있었다.
연습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서울에선 볼 수 없던 별이었다.
그 별빛을 보니, 괜히 마음이 놓였다.
하은이 옆에서 작게 말했다.
“이 노래, 꼭 많은 사람들한테 들려주자.”
“응.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엔 아버지도 있었으면 좋겠다.”
민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언젠간 아버지도 이 노래를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