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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무대

우리의 작은 무대 - 1부. 새로운 전학생

by 창작소설 글쓴이 2025. 7. 6.

《우리의 작은 무대》

1부. 새로운 전학생

햇살이 시야를 찌푸리게 할 정도로 눈부셨다.
버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빛은 따가웠지만, 그 아래 펼쳐진 풍경만큼은 민준에게 너무도 낯설고 낯간지럽게 평화로웠다.
서울에서 살던 민준의 기억 속 풍경은 언제나 삭막하고 시끄러운 회색빛이었다.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찬 지하철, 늘 막히는 도로, 초조한 발걸음들.
그에 비해 지금 민준이 보고 있는 건 끝없이 펼쳐진 초록 논과,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는 황토색 트럭, 그리고 느릿느릿 자전거를 타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버스 좌석에 몸을 기댄 민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그저 무표정했다.
조금만 더 웃으면 좋을 텐데, 아니 조금만 더 덤덤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전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감은 민준의 입꼬리를 결코 올려주지 않았다.

‘또 시작이다…’

민준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중얼이며 창밖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렸다.
꺼내보니 엄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잘 도착하면 연락해. 적응 못 하면 언제든지 말하고.

민준은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곧이어, “그래도 잘 해볼게”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곳으로 이사 온 건 결국 민준 자신의 결정이었다.
서울에서의 지독한 기억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곳에서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었다.

버스는 작은 시내를 지나 드디어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 앞에서 멈췄다.
민준은 기타 케이스가 든 가방과 교과서를 넣은 백팩을 어깨에 둘러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학교 정문엔 ‘○○고등학교’라는 낡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여긴 3층짜리 저층 건물에 운동장은 아직 흙바닥이었고,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좋게 말하면 한적하고, 나쁘게 말하면 좀 촌스럽네…”

민준은 작게 중얼이며 정문을 지나 학교로 들어섰다.
아직 오전이라 복도는 다소 소란스러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 장난치는 소리, 그리고 발걸음들이 얽혀 있었다.
민준은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새 반으로 안내받았다.

복도 끝, 햇살이 가장 잘 들어오는 교실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문을 열고 민준에게 손짓했다.

“얘들아, 잠깐 주목.”

순간 시끌벅적하던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들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문가에 선 민준을 바라봤다.

“오늘부터 우리 반에 새로운 친구가 왔어. 서울에서 이사 온 이민준. 다들 잘 지내보자.”

민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짧은 순간에도 교실 안의 시선들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서울에서 왔대’, ‘기타 케이스 들고 있는 거 봐’ 같은 작은 속삭임들이 들렸다.

“자, 민준이는 저기 뒷자리로 가면 되겠다.”

담임이 가리킨 자리는 창가 끝자리였다.
햇살이 듬뿍 들어오는 자리였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가서 앉았다.
주변에서 흘끗흘끗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려 했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야, 서울에서 왔냐? 이름이 민준이라 그랬지?”

민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 이민준.”

“나는 박형우. 반장 같은 거 하고 있어. 잘 부탁해.”

그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민준도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교실 앞쪽에서 자리를 정리하던 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긴 생머리를 부드럽게 넘기며 친구들과 웃고 있는 모습이 뭔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얼굴에 장난기보다는 맑은 생기가 가득했다.
그녀가 잠시 고개를 들어 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민준은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뺨이 괜히 달아올랐다.
그저 가벼운 인사일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민준은 혼자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엄마가 싸준 김밥과 과일이었다.
서울에서도 혼자 밥 먹는 건 익숙했지만, 이곳은 유난히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주변에선 친구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났다.

그때 다시 박형우가 다가왔다.

“같이 먹을래?”

“아… 괜찮아. 그냥…”

“괜히 그러지 말고. 너 새로 왔잖아. 친구들 좀 사귀어.”

형우가 강하게 팔을 잡아끌어 옆 테이블로 데려갔다.
거기엔 아까 인사했던 여자아이도 앉아 있었다.

“민준이 맞지? 서울에서 왔다는.”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또렷한 눈빛과 맑은 표정이었다.

“난 윤하은. 이 반 반장이자, 우리 학교 밴드부 보컬.”

“아… 반가워.”

민준은 조심스레 웃었다.
하은은 민준의 기타 케이스를 힐끗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너 혹시 기타 치니?”

“어… 조금. 그냥 혼자.”

“혼자? 그 정도로 기타 들고 다니는 애가? 대단한데.”

하은이 놀리듯 웃었다.
민준은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하은이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우리 밴드부에 꼭 와. 이건 부탁이야.”

민준은 아직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뭔가 너무 빠르다고 느껴졌다.
밴드부라니, 아직 이 학교 친구들이 어떤지, 이 마을이 어떤지도 모르는걸.

그런 민준의 머뭇거림을 본 하은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좋아. 내가 언젠가는 널 우리 밴드로 끌어들이고 말 거야.”


학교가 끝나자 민준은 음악실이 궁금해졌다.
하은이 밴드부라고 했으니, 학교에 연습실 같은 게 있을 터였다.
교문 밖으로 나가려다 발길을 돌려 학교 뒤편으로 갔다.
거기엔 오래된 벽돌 건물이 하나 있었다.
음악실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낡은 피아노와 드럼, 기타 앰프가 놓여 있었다.
햇빛은 살짝 빛바랜 커튼 사이로 들어와 먼지 속에서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민준은 무심결에 기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줄을 튕겼다.
E minor, C, G, D.
익숙하고, 그래서 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코드 진행이었다.

눈을 감고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연주를 이어갔다.
혼자 있는 이 순간만큼은 서울에 있던 때의 상처도, 전학 온 낯섦도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
기타 소리가 오래된 나무 벽을 타고 울리며 그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민준은 깜짝 놀라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윤하은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기타 치는 거 맞잖아.”

민준은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은은 음악실 안으로 들어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민준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너, 내일 우리 밴드 애들 만날래? 너 같은 기타리스트, 우리한텐 보물이거든.”

민준은 아직도 망설였다.
하은은 그런 민준을 한참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괜찮아. 오늘은 그냥 기타만 치고 가. 대신… 내일도 여기서 보자.”

그녀가 나가고 난 음악실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민준은 가만히 앰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내일도… 여기서?”

기타 줄을 다시 퉁기자, 음이 조금 더 부드럽게 울렸다.
낯설고 어색했던 이 학교가, 이 마을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