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작은 무대》
16부. 다시 일어서는 우리
첫 번째 큰 실패는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대회장에서 내려오는 계단에 무릎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던 감각이,
심사위원들이 무표정하게 종이에 무언가 적던 모습이,
그리고 끝내 발표에서 스페이스러브라는 이름이 불리지 않던 순간이
계속해서 민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민준은 밤에 혼자 기타를 잡으면 이상하게 줄을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손가락이 조금만 삐끗해도 숨이 가빠졌다.
‘또 틀리면 어떡하지…
또 저 조명 밑에서 들켜버리면…’
그럴 때면 축제 무대에서 울리던 박수 대신
도청 대강당에서 들리지 않던 관객들의 침묵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은은 그런 민준을 누구보다 잘 알아챘다.
음악실에서 연습을 하다가 민준이 자꾸 혼자만 박자를 늦추거나,
코드를 잡다 말고 한숨을 내쉬면
하은은 피아노에서 살포시 일어나 민준 옆에 다가왔다.
“민준아.”
“왜.”
“그때 그 대회… 우리 진짜 열심히 했잖아.”
“근데 결과는 그거였잖아.”
하은은 잠시 민준의 기타 줄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우리가 결과보다 더 중요한 걸 만들었다고 생각해.”
민준은 하은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여전히 흔들렸지만, 그 속에서 하은은 분명 무언가를 보았다.
그날 밤, 네 사람은 연습을 마치고 음악실 바닥에 원을 그리고 앉았다.
준호가 피곤한 듯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야, 근데 우리 그 대회 나갔다가 떨어진 거…
솔직히 나 아직도 부끄럽다.”
유리는 작게 고개를 떨궜다.
“나도… 그날 이후로 베이스 연습 더 열심히 하게 됐어.
또 틀릴까 봐.”
하은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살며시 말했다.
“우리 틀렸던 건 맞아.
근데 그거 때문에 더 하고 싶어졌어.”
준호가 피식 웃었다.
“야, 하은이 너 완전 이상한 사람 같아.”
“맞아.
근데… 그 이상함이 우리 밴드의 멋이잖아.”
민준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하은의 얼굴에는 오히려 더 단단한 미소가 있었다.
다음 날부터 네 사람은 정말로 다시 처음부터 다시 했다.
민준은 연습 노트를 새로 만들었다.
자신의 코드 운지, 오른손 피킹 위치, 박자에 맞춰 호흡 넣는 부분까지 꼼꼼히 적었다.
준호도 드럼 스틱을 잡은 손등에 테이프를 감고, 땀이 배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준비했다.
유리는 음계 연습만 하루에 두 시간을 따로 하며 박자를 몸에 새겼다.
하은은 목을 혹사하지 않기 위해 따뜻한 물을 매일 들고 다녔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연습을 거듭하며 고음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하려 애썼다.
“우리 다음에 더 큰 대회 나가자.”
하은이 피아노에 앉아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해보자.”
민준은 그 말을 듣고 기타를 조심스레 눌렀다.
“그래.
다시는 무대에서 주눅들지 않게.”
겨울이 끝나갈 즈음, 더 큰 규모의 봄 청소년 밴드 페스티벌 모집 공고가 떴다.
하은이 핸드폰을 들고 음악실로 뛰어왔다.
“얘들아!
이거 작년보다 참가 팀도 훨씬 많아졌대.
우린 더 잘해야 할 거야.”
준호는 스틱을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좋지!
이제 우리도 한 번 물 먹었으니까, 이번엔 진짜 잘할 수 있다.”
유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이 연습 더 하자.”
민준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작게 웃었다.
무섭지만, 이상하게 이번엔 조금 설렜다.
네 사람은 다시 매일 음악실에 모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가방을 챙겨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추운 겨울이 지나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
그 바람이 스피커를 타고, 기타 줄을 흔들었다.
유리의 베이스는 이제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준호의 드럼은 무게감이 더해졌고, 하은의 목소리는 낮은 음부터 고음까지 거침없이 뻗었다.
민준도 이제는 손끝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마음이 떨렸다.
음악에 온전히 몰입하면, 그 두근거림이 기분 좋았다.
연습을 마치고 음악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네 사람은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 있지, 이번 대회 끝나면 아빠한테 내 연주 영상 보여주려고.”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하은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
그동안 한 번도 안 보여줬잖아.”
“응…
근데 이제는 좀 보여주고 싶어.”
준호가 스틱을 돌리며 웃었다.
“야, 너 아버지가 울면 어쩔 거냐.”
“설마 울겠냐.”
“아냐.
부모님들이 그런 데서 더 운다니까.”
유리는 작게 웃었다.
“우리 이번엔 꼭 좋은 무대 하자.
그리고… 우리 다 같이 그 무대 영상 갖고 싶어.”
민준은 그 말을 듣고 하은과 눈을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작게 웃었다.
밤늦게 음악실을 나서며,
민준은 하은과 조금 떨어져 천천히 걸었다.
하은이 민준 옆으로 다가오더니,
살짝 팔을 툭 쳤다.
“왜, 또 겁나?”
민준은 장난스럽게 하은의 머리를 살짝 쥐었다.
“아니.
근데…
너랑 이렇게 계속 노래하고 싶어서 더 조심스러운 거지.”
하은은 그 말을 듣더니, 살짝 고개를 들어 민준을 바라봤다.
“난 네가 무대에서 웃으면 제일 좋더라.”
“웃어?”
“응.
너 기타 치면서 나 쳐다보고 살짝 웃을 때 있잖아.
그때 나도 무대가 하나도 안 무서워져.”
민준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하은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더 많이 웃게 해줄게.”
하은은 그 손을 더 꼭 잡으며 말했다.
“응.
나도 너 더 많이 노래하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