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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무대

우리의 작은 무대 - 4부. 꿈을 놓지 않는 이유

by 창작소설 글쓴이 2025. 7. 6.

《우리의 작은 무대》

4부. 꿈을 놓지 않는 이유


민준은 그날 이후 한동안 음악실에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축제에서의 실패는 그에게 생각보다 훨씬 깊은 흉터를 남겼다.
핸드폰 속에는 친구들이 찍어 올린 동영상이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영상에서 민준은 박자를 놓치고 당황해 기타를 멈추었다가, 다시 어설프게 연주를 이어가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밤에 혼자 방에 누우면 그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재생됐다.
자기가 틀린 소리, 하은이 흔들린 목소리, 관객들의 애써 내는 박수 소리까지 전부 생생했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무너질까…’

민준은 방 한구석에 놓인 기타 케이스를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잠도 못 들고 꺼내서 손가락이라도 놀렸을 텐데, 요즘은 케이스를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손끝이 괜히 찌릿거리기만 했다.


학교에 가서도 민준은 조용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일부러 혼자 있었고, 친구들이 다가오면 대충 웃으며 피했다.
무대에서 실수했던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 같아 괜히 움츠러들었다.

그러던 며칠 뒤였다.
교실 복도 창문에 기대어 있는데, 저 멀리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하은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민준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은은 축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씩씩하게 보였다.

그때 하은이 민준을 발견하더니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민준은 순간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가슴은 마치 들킨 것처럼 뛰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서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은이었다.

“민준아, 오늘도 연습 안 올 거야?”

민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연습?”

“응. 우리 오늘도 음악실 모이기로 했잖아. 너 안 온지 며칠째야.”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은은 그런 민준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의자 옆에 앉았다.

“민준아… 너 솔직히 말해봐. 무서워서 그런 거지?”

민준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은은 그걸 대답으로 여겼는지 살짝 웃었다.

“나도 무서워. 솔직히… 그 무대 이후에 나 몇 번이나 집에서 울었는지 몰라.”

민준은 놀란 얼굴로 하은을 바라봤다.
하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노래가 전부였거든. 친구도 별로 없고, 가족들이랑도 딱히 친하지 않고… 노래만 있으면 다 괜찮았어. 근데 무대에서 그렇게 흔들리니까, 내가 너무 바보 같더라.”

민준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풀렸다.
하은은 살며시 민준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그래도 하고 싶어. 그래서 더 하고 싶어졌어.
나 그 무대 다시 서보고 싶어.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민준은 한숨처럼 작게 웃었다.

“너 진짜 대단하다.”

“아니야. 오히려 너가 더 대단해.
네가 없으면 우리 밴드 노래도 못해. 기타 없으면 다 허전하잖아.”

하은은 조금 진지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봤다.

“나는 우리가 다시 무대 서는 날, 네 기타 소리 들으면서 노래할 거야.
그러니까… 다시 같이 하자.”


그날 저녁, 민준은 방에 돌아와 한참을 기타 케이스를 바라보다 결국 조심스럽게 열었다.
손에 기타를 쥐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축제 이후 처음 치는 거라 손끝이 무뎌진 것 같았지만, 금세 익숙한 감각이 돌아왔다.

민준은 조용히 E minor를 눌렀다.
그러자 방 안에 부드럽게 울리는 기타 소리가 퍼졌다.

‘역시… 이거 없으면 안 되잖아.’

민준은 작게 웃었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코드 진행을 만들었다.
그러자 마치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방과 후, 민준은 음악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그리웠다.
드럼 소리, 유리의 낮은 베이스, 하은의 목소리.

문을 열자 준호가 신나게 드럼을 치다가 민준을 보고 환히 웃었다.

“야! 드디어 오셨네, 기타 천재님!”

유리도 살짝 고개를 들어 웃었다.
하은은 피아노에서 일어나 민준에게 달려왔다.

“왔다! 이제 진짜 다시 제대로 해보자.”

민준은 멋쩍게 웃으며 기타를 들었다.

“오래 기다렸지? 이제 다시 할게.”


첫 합주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다들 긴장해서 조심스럽게 연주했다.
민준도 손끝에 힘을 주어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두세 번 반복하자 조금씩 숨이 편안해졌다.
하은의 목소리가 한층 맑게 올라갔고, 준호는 리듬을 더 자연스럽게 탔다.
유리는 예전보다 눈을 감고 연주했다.
마치 소리에 더 몰입하려는 듯.

곡이 끝나자, 다들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야… 이제야 우리 진짜 밴드 같지 않냐?”

준호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하은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민준을 바라봤다.

“맞아. 네가 있어서 그래.”

민준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뭐야, 부담스럽게…”

그러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연습이 끝난 후에도 네 사람은 음악실에 남았다.
하은은 피아노를 두드리며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만들었다.
민준은 그 멜로디 위에 살포시 기타를 얹었다.
유리는 조용히 박자를 타며 베이스를 넣었고, 준호는 의자에 앉아 무릎을 두드리며 드럼 비트를 흉내냈다.

그러다 문득 하은이 말했다.

“우리 이 노래, 이번에 다시 무대 설 때 하자.”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제목도 없는데?”

“그러니까 더 좋아. 우리 이야기로 만들자.”

하은은 피아노를 치며 작게 흥얼거렸다.

“조금은 서툴러도, 괜찮아… 너와 나… 우리의 작은 무대…”

민준은 그 소리를 들으며 살짝 웃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기타 줄을 타고 흘렀다.


밤이 깊어가자, 창밖으로는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들어왔다.
음악실은 마치 그들만의 세계 같았다.
아무도 없고, 오직 네 사람만이 소리로 이어져 있었다.

하은은 피아노 앞에서 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민준아, 너는 왜 음악 해?”

민준은 잠시 기타를 내려놓고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냥… 이거라도 없으면, 내가 내가 아닐 것 같아서.”

“멋지다.”

하은이 작게 웃었다.

“난 그냥 노래하면… 세상에서 나 혼자 남은 것 같지 않아서 좋아.”

유리는 베이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작게 속삭였다.

“나는…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안 무서워서…”

준호는 의자에 기대며 스틱을 돌렸다.

“난 솔직히 너희랑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게 제일 좋아서 한다.”

그 말을 듣고 다들 웃었다.
민준은 그 웃음 속에서 가슴이 조금 아렸다.
그러나 이번엔 그 아림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했다.


음악실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민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들이었다.
마치 정말로 스페이스러브라는 이름처럼, 저 멀리까지 뻗어 있는 우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민준은 기타 케이스를 한 번 더 꼭 끌어안았다.
축제에서의 실패가 아직도 마음 한구석을 찔렀지만,
이제는 그 실패 덕분에 더 깊게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괜찮아. 다음엔 더 잘할 거야.’

그렇게 다짐하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