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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작은 무대

우리의 작은 무대 - 5부. 베이스 유리의 비밀

by 창작소설 글쓴이 2025. 7. 7.

《우리의 작은 무대》

5부. 베이스 유리의 비밀


유리는 언제나 조용했다.
밴드 연습을 할 때도, 수업 시간에도, 점심을 먹을 때도.
늘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고, 가끔은 작은 웃음으로만 마음을 표현했다.
민준은 그런 유리가 처음엔 조금 불편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서, 혹시 자신이 불편한가 하고 괜히 눈치를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습이 거듭될수록 민준은 유리가 결코 무심하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오히려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조용히 모두를 살피고 있었다.
어설픈 합주가 끝난 뒤에도 민준이 주저앉아 있으면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살며시 물병을 건네주곤 했다.
처음에는 그냥 건성으로 받았지만, 나중에는 그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알게 됐다.


그날도 평소처럼 연습을 마치고 모두가 각자 악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하은은 피아노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우리 이번 주말에 연습 조금 더 하자. 다음엔 진짜 제대로 맞춰보자.”

준호가 스틱을 돌리며 웃었다.

“오케이! 난 불러만 주라.”

민준은 앰프에서 잭을 뽑으며 유리를 슬쩍 바라봤다.
유리는 가만히 베이스 줄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있었다.
어딘가 멍하니 보였다.


연습실을 나서며 준호와 하은이 앞서가고, 민준은 유리와 나란히 걷게 됐다.
학교 담장 너머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민준은 괜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유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민준아.”

민준은 조금 놀라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가 자기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어… 왜?”

유리는 잠시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다, 민준을 향해 조심스레 웃었다.

“고마워.”

“뭐가?”

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나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너랑 준호, 하은이… 다들 자연스럽게 대해줘서.”

민준은 그 말을 듣고 괜히 마음이 찡했다.
그는 멋쩍게 웃었다.

“뭘. 우리가 뭐 대단한 거 했냐. 그냥… 친구니까.”

유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고개 끄덕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며칠 뒤였다.
토요일 늦은 오후, 네 사람은 음악실에 모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잘 맞지 않던 리듬도 이제는 훨씬 부드럽게 이어졌다.
하은의 목소리는 안정적이었고, 민준의 기타는 그 위를 자유롭게 달렸다.
준호의 드럼도 더 단단해졌다.
무엇보다 유리가 달라졌다.
처음엔 박자를 맞추느라 줄곧 바닥만 보던 유리가, 이제는 눈을 감고 리듬에 몸을 살짝 맡기며 연주하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모두 숨을 고르며 웃었다.
하은이 유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리야, 너 오늘 진짜 좋았다.”

유리는 얼굴이 빨개지더니 작게 웃었다.

“정말?”

“응. 너 베이스 라인이 이제 완전 노래랑 하나 같아. 나 진짜 신났어.”

준호도 손을 번쩍 들며 동의했다.

“맞아 맞아! 내가 드럼 칠 때 네 베이스가 딱 잡아주니까 나도 훨씬 편했음.”

민준은 유리를 보며 작게 엄지를 세웠다.
유리는 얼굴이 더 붉어지며, 하지만 뿌듯한 듯 고개를 숙였다.


연습이 끝나고 넷은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분식집 벽엔 학생들이 남긴 낙서가 빼곡했다.
‘○○고 2학년 3반 졸업 기념’, ‘짱나지만 그래도 좋았다’ 같은 낙서들이 쌓이고 쌓여, 벽돌색조차 희미했다.

“나 이거 보니까 우리도 밴드 이름 하나 적고 가야 할 것 같지 않냐?”
준호가 떡볶이를 한입 먹으며 말했다.

“오 좋다!”
하은이 눈을 반짝이며 종이를 찾았다.

결국 휴지 뒷면에 ‘스페이스러브’라고 크게 적고, 네 명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그리고 사장님께 허락을 받아 벽 한구석에 붙였다.

“언젠가 다시 여기 와서 보면 웃기겠다.”
민준이 말했다.

“그러게… 그때도 우리 여전히 같이 음악 하고 있겠지?”
하은이 살짝 웃었다.

그 말에 유리가 조용히 말했다.

“응.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그날 이후 유리는 조금씩 더 달라졌다.
연습 중에도 가끔 농담을 했고, 준호가 일부러 장난을 치면 작게라도 웃었다.
하은과 민준은 그런 유리를 볼 때마다 속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연습을 끝내고 음악실을 나서는데 유리가 혼자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은이 민준을 보고 눈짓을 했다.

“나랑 준호는 먼저 갈게. 너 유리랑 같이 가.”

민준은 조금 어색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과 준호가 먼저 나가자 음악실엔 둘만 남았다.

민준은 괜히 앰프를 정리하는 척하며 유리에게 말했다.

“오늘도 좋았다. 너 베이스 완전 안정됐어.”

유리는 작게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가방을 메고 음악실 문을 향하다가 문득 멈췄다.
그러더니 민준에게 말했다.

“민준아… 혹시 시간 좀 돼?”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음악실 옆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가을 저녁 공기가 부드럽게 불어와 유리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유리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중학교 때 좀 힘들었어.”

민준은 놀란 얼굴로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좀 많이 따돌림을 당했거든.
처음엔 별거 아니었는데, 점점 심해져서… 나중엔 학교 가는 게 너무 무서웠어.”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유리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때 난 매일 이어폰 꽂고 음악만 들었어.
학교에서도, 집에 가는 길에서도.
그때 아니면 숨을 못 쉴 것 같아서…”

유리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사람들하고 말하는 게 어려워졌어.
뭘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괜히 눈치만 보게 되고.”

민준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베이스 잡게 된 거야?”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소리가 낮잖아. 주목받지도 않고… 그냥 뒤에서 받쳐주는 거.
난 그게 좋아.”

그러다 유리가 민준을 바라봤다.

“근데 요즘엔 좀 달라.
하은이랑 준호, 그리고 너랑 같이 연주하면…
왠지 내 소리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말에 민준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유리의 어깨를 툭 쳤다.

“필요하지. 너 없으면 우리 완전 밑 빠진 팀이야.”

유리는 살짝 놀라더니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이번엔 조금 더 환했다.


그날 이후 유리는 더 이상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연습 때도 박자를 맞출 때 민준과 눈을 마주치며 작은 신호를 주고받았다.
하은은 그걸 보며 눈치를 주며 씩 웃었고, 준호는 “우리 둘이 은근 코드 맞는다?” 하고 놀렸다.

민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타 치는 게 좋아서 시작한 밴드였는데,
이제는 이 친구들이 좋아서 더 치고 싶어졌다.


연습이 끝난 어느 날, 네 사람은 음악실에 그대로 남았다.
하은이 피아노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언젠가 진짜 큰 무대 서보자.
여기 운동장 같은 거 말고, 조명도 번쩍이고, 관객도 엄청 많은 그런 데.”

준호가 피식 웃었다.

“아 그럼 나 스틱 다섯 개 부러뜨린다.”

민준은 기타를 품에 안고 고개를 기울였다.

“좋지. 언젠가.”

유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도… 우리 네 명이면 좋겠다.”

민준은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는 살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제 더 이상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기대로 반짝였다.